[원고 8] 허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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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를 배우는 외국인을 예로 들어보면 영어를 배우는 우리의 모습이 더 잘 드러난다.

외국인 두 사람이 ‘집’이라는 한국어 단어를 공부한다고 치자. ‘집’의 가장 일반적인 뜻은 ‘우리가 살고 있는 건물’. 하지만 ‘집’의 용법은그게 전부가 아니다.

둘 중 한 사람은 아래와 같은 ‘집’의 여러 용법이 궁금하다.

이 집에서 제일 잘 하는 게 뭐죠? 집밥 꾸준히 먹으면 살 빠져. 우리 집에선 둘째가 제일 말을 안 들어. 집사람이 허락을 안 해. 집안 일이 많아.

‘살고있는 건물’ 외에 이렇게 다양한 용법이 있다고 재미있어 한다.

다른 외국인의 모습은 이렇다.

‘자택’과 ‘저택’이 ‘집’과 비슷한 단어인지 물어본다. 그리곤 ‘자택’과 ‘저택’의 차이를 궁금해한다. ‘가옥’이라는 단어도 어제 배웠다고 자랑한다. ‘주택’도 있는데 그건 그냥 집과 어떻게 다르냐고 물어본다. ‘관사’라는 단어를 봤는데 무슨 뜻이냐고 묻는다. ‘축사’라는 단어도 봤다면서 관사나 축사에 나오는 ‘사’자가 집의 뜻이냐고 물어본다.

엄청난 실력의 한국어 실력을 갖춘 외국인이면 이런 질문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작 이 외국인의 실제 한국어 구사 능력이 이 정도면?

자기 소개는 두 세 마디 하면 끝난다. 편의점 가서 물건 하나 제대로 못 산다. 길 물어볼 때도 주저하고 더듬대기 일쑤다. 어느 주제를 놓고 길게 말하는 건 상상도 못 한다.

상식에 맞는 학습법으로 보이지 않는다. 좋게말하면 지식으로 언어를 대하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그냥 ‘허세’ ‘과시’용이다. 지식영어에 세뇌된 우리 모습도 이와 다를 바 없다. 아니, 아주 똑같이 겹쳐진다.

서울 지하철. 사람마다 주로 가는 구간과 이용하는 노선이 있다. 나는 서울 토박이지만 서울 지하철은 2호선외에는 잘 모른다.

지하철을 ‘교통 수단’으로 여긴다면, 그냥 여기 저기 타고 다니면 된다. 자주 가면 익숙해지고 그럼 그 노선은 자연스럽게 내 것이 된다. 영어를 ‘의사소통 수단’으로 여긴다면 그냥 매일 이것 저것 접하고 써보면 된다. 자주 보면 익숙해지고 그럼 그 표현은 자연스럽게 내 것이 된다.

지하철을 ‘허세’ ‘과시’ ‘지식’의 차원에서본다면 (그런 사람이 있을까? ^^) 집에서 서울 지하철노선도를 외우고 있지 않을까? 평소 이용하지 않는 노선, 평생갈 일이 없는 노선, 보통 사람들은 거의 모르는 노선, 역, 심지어 출입구 번호까지 외우지 않을까? 서울 지하철도 모자라 러시아 모스크바 지하철 노선도까지 외울 지 모른다. 그리곤 만나는 사람마다 이런 질문을 던진다 – “너 모스크바에 이런 역 있는 거 알아?”

우리의 단어 학습은 마치 정치인들이 길거리에서 악수하는 모습 같다. 미친듯이 그 숫자만 늘리려고 하는 모습. 그냥 막 악수만 하면서 가는 거다. 그리곤 악수했으니 자기 사람이라고 착각한다.

‘집’ 하나론 모자라 ‘자택,’ ‘저택,’ ‘가옥,’ ‘주택,’ ‘관사,’ ‘축사’ 이런걸 일단은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우리의 단어학습 방식이다. 전형적인 ‘지식영어’의 모습이다.

이제 ‘지식영어’ 괴롭히는 것을 잠시 멈추고, 우리의 영원한 친구 ‘언어영어’ 쪽으로 와보자.

영어 단어 house.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이 단어. 그런데 It’s on the house 라는 간단한 문장이 무슨 뜻인지는 대부분 모른다. 그런 사람이 residence,dwelling, shack, flat, domicile 같은 단어를 공부하고 있다.

on the house는 모르는데 residence, dwelling,shack, flat, domicile을 외우고 있다???

지식영어가 언어영어를 압도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건 정말 아니다.

‘house=집’이면 충분하지 않느냐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문제 하나 낸다. 아래 네 개의 우리말 문장을 영어로 해보는 거다. 단, 조건이 있다. 그냥 막 해보는 거다. 그냥 하고 싶은 대로, 문장이 길어도 좋고 짧아도 좋고, 문법적으로 틀려도 좋고, 상관없다.지금 당장 저 말을 못 하면 범인으로 오해 받아 경찰에 체포된다는 심정으로 지금 당장 바로 해보자.

지금 당장 얼마나 할 수 있는 지가 여러분의 진정한 언어 실력이다. 실전에서는 시간이 넉넉하지 않다.

그 식당에선,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하다며 디저트를 서비스로 줬다. 이 교도소에는 약 3,000명의 수감자와 300명정도의 직원이 있다. 에릭 클랩튼은 매디슨스퀘어가든을 가득 메운 청중 앞에서 멋진 공연을 선보였다 내게 이래라 저래라 하기 전에 네 문제부터 해결해야 하지 않을까?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지금 당장 해보자.

이전 페이지에 나온 문장 네 개를 표현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 그 모습이 여러분 영어의 본 모습일 수 있다. 지식영어에 충실해 아는 것은 많을 지 몰라도 정말 필요한 것은 모르는 우리 영어의 본 모습.

“영어, 꽤 한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영어는 안 늘지?”– 정작 필요한 것은 안 하고 이상한 곳에서 놀고 있기 때문이다.

ambiguity, ubiquitous, carcinogen,deterioration, deforestation – 이런단어들은 외우려고 노력하지만, 막상 앞에 나온 네 개 문장은 쩔쩔매는 게 우리의 영어 민낯이다. 문제로 제시한 네 문장, 어려운 단어 하나도 없어 보인다.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쓰는 이른바 생활한국어 정도 수준.

ambiguity, ubiquitous, carcinogen,deterioration, deforestation 이런 단어들보다급이 낮은, 이른바 저급(?) 단어 정도만 있어도 충분히 해결된다. 그런데 우리는 이 저급 단어를 모른다. 아니, 안다고 착각하고 생전 보지도 못할 어려운 단어들만 붙잡고 있다. 그게실력인 줄 착각하고 있다.

지식영어가 낳은 결과이다.

조금 전에 말한 저급 단어는 house.

‘house=집’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않다. 전국민이 다 아는 house 를 넣어서 위 문장을 하나씩 만들어 보자.

a. 그 식당에선,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하다며 디저트를 서비스로 줬다.

They apologized for the long wait and gave us dessert on the house.

house:n. 회사, 기업 – 유명 출판사 Random House 처럼 회사명에 house가 들어가기도 한다. 경매업체를 an auction house라고 한다.

onthe house – 회사가 부담, 즉 식당이 부담한다는 뜻. 그래서 서비스.

It’son me (내가 살게) -on the house 와 같은 맥락에서 보자.

위 문장은 음식을 기다렸을 수도 있지만, 밖에서자리 나기를 기다렸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They apologized for the long wait for the food 혹은 the long wait for a seat 이라고 하면 된다.

on the house 대신 ‘공짜’라는 뜻의 for free 도 좋다 – gave us dessert for free

b. 이 교도소에는 약 3,000명의 수감자와 300명 정도의 직원이 있다.

The prison houses about 3,000 inmates and employs about 300 workers.

house:v. 거처를 제공하다 – A라는 장소 안에 B가 살고 있을 때, A house B.

직원은 명사 employees 도 좋지만, employ를 동사로 사용하는 것도 한 방법.

이렇게 적어도 된다 - The prison has about 3,000 inmates and 300 employees.

c. 에릭 클랩튼은 매디슨 스퀘어 가든을 가득 메운 청중 앞에서 멋진 공연을 선보였다.

Eric Clapton gave a great performance to a packed house at Madison Square Garden.

house:n. 관객, 군중 / a packed house 혹은 a full house – 그 장소를 다 메운 관객들.

다른 식으로 적어보자.

Eric Clapton put on an amazing show before a sellout crowd.

sellout: v. 매진 / a sold-out crowd 혹은 a sellout crowd – 자리를 꽉 메운 청중, 관중

put on: v. (행사, 파티) 만들어내다, 선보이다

d. 내게 이래라 저래라 하기 전에 네 문제부터 해결해야 하지 않을까?

You should put your own house in order before telling me what to do.

to put your house in order: v. 너부터 잘해 - 너희 집부터 정리정돈 잘 하라는 느낌

이래라 저래라 한다는부분은 before you start giving me advice 혹은 before telling me to do this and that 도 괜찮다.

경제나 정치를 바로잡는다고 할 때 house 앞에 political 이나 economic 같은 형용사를 넣어 응용할 수도 있다 – The country needs to put its economic house in order. (그 국가는 경제를 바로 잡아야 한다)

“너나 잘 해”라고 할 때 다른 표현 – Before you accuse me, take a look at yourself.

이런 설명을 해도 ‘house=집’이면 충분하고 residence, dwelling, shack, flat,domicile 외우는 게 먼저라고 생각하는지? 지금까지 걸어왔던 영어 실력 늘지 않는 길이 바로 그런 생각이다. 쓸 일도 없는 단어들 외우고 까먹고 외우고 까먹다가 우리네 인생 다 간다.

지식영어가 남긴 폐해는 단어 학습은 물론 문법, 독해, 청취, 회화, 작문 모든 분야에 남아있다. 지금은 단어 학습만, 그것도 house 라는 단어 하나만 가지고 살펴봤다.

지식영어는 ‘house=집’ 이 끝이다. 언어영어는 성급하게 house 의 고급 단어로 올라가지 않는다. 쉽게 느껴지는 house의 여러 용법을 시간을 두고 여러 번 접하면서 서서히 내 것으로 만들어 간다. 물론 시간은 걸린다. 하지만 언어 학습은 원래 시간이 걸리는 거다. 빨리 결과가 나오는 게 더 수상한 거다.

앞에 나왔던 원어민 10살 아이. 그 아이가 10살 될 때까지 하는 단어 공부 역시 이런 방식이다. 자신의 경험에도 없는 이상한 어려운 단어로 섣불리 올라가지 않는다. 익숙한 단어 house의 다양한 용법을 알아가는 게 먼저니까.

언어는 아이들이 배우는 대로 하는 게 정답이다.

댓글 문답

독자: 선생님! 정말 좋은 글 감사합니다… 빨리 책으로 나왔으면 좋겠네요 ㅎㅎ 사전에 house 검색해 보니 I work in house가 쌤께서 말씀하신 대로 ’회사’라는 뜻이 있네요 따라서 그 의미가 (재택 근무가 아니라) 회사에서 근무한다. 이렇게 나오는데 이게 무조건인가요 문맥 속에서 정해지는 걸까요??

오성호: in-house : 하나의 표현으로 보통 ‘사내’ ‘회사 소속’ 이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http://www.learnersdictionary.com/definition/in%20house


오성호: 제일 마지막 내용이 참 좋네요. 영어 “공부”가 아닌 하나의 언어로 영어를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단어에 대한 느낌이 달라집니다. 잘 하고 계신거예요~ ^^


독자: 우리나라 영어교육은 비실용적인 예외 투성이 고난도 문법 문제를 맞히기 위해 문장론(통사론, syntax)+시험영어(지식영어)의 합격하기 위해 단어 많이 외우기(Vocabulary 30000, 50000 등등…)+영어-한국어 1:1 대응 번역이 끝인 것 같아요. 한국인들은 한국어 순우리말(고유어)의 다양한 다의어로 대화를 많이 합니다. 네이버 국어사전에서 한국어의 대표적인 기초 어휘 ’먹다’를 검색하면 용례(usage)가 어마어마합니다. 관용표현도 쌩기초 단어들을 많이 씁니다. 예를들어 <미역국을 먹다, 누워서 떡 먹기, 땅 짚고 헤엄치기, 김칫국 부터 마시다> 미역국, 먹다, 눕다, 떡, 땅, 짚다, 헤엄치기, 김칫국, 마시다 등 전부 한국어의 쌩기초 단어들인데 이런 표현을 처음본 외국어 화자들은 “저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 할 것입니다. 거기다가 한국 특유의 문화가 반영된 관용 표현들도 무지하게 많구요. 한국어의 고유어 쯤에 해당하는 영어의 앵글로색슨어 계통의 간단한 어휘로 무수히 많은 기초동사+전치사 혹은 부사 형태의 구동사(phrasal verbs), 관용적 표현(idiomatic expression)이 한국인들에게 엄청 어렵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한국 영어교육에는 의미론(semantics) 교육이 실종돼서 라고 생각합니다. 영어 기초단어들을 속 뜻 깊이 파고드는 수업 및 그것들을 이용해서 실례를 다루어보는 교육이 전무하다는 것이죠. 여기에도 당연히 미국 특유의 문화가 녹아있는 표현들이 무수히 많구요… 한국어의 한자어는 영어의 라틴어와 그리스어계통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는데요.(물론 기초 한자어들도 많지만 전문분야로 갈수록 고급 한자어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아집니다.) 라틴어와 그리스어 계열의 어려운 영어단어는 우리가 소위 시험영어라고 하는 곳에서 엄청나게 많이 튀어나오는 것들이잖아요. 정리해보자면 지금의 우리나라 영어교육의 모습은 한국어의 기초표현도 제대로 구사하지 못 하는 사람이 어려운 한자어가 득실득실한 전문분야를 배우고 있는 것과 똑같은 거네요…

오성호: 우리 영어는 너무 어려워졌어요. 어려운 영어 필요한 사람도 물론 있지만 극소수에 불과하거든요 ㅜㅜ


독자: 근데 책 내용을 이렇게 미리 공유하셔도 되나요? 걱정되어서요

오성호: 책 내용 중 극히 일부분입니다. 그리고 최종 원고가 아니라 괜찮습니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

이 글은 2017.05.15 네이버 카페 「오성호 영어채널」의 ‘영어, 이제는 잘할 때도 됐다’ 게시판에 처음 올라온 글입니다. 카페 원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