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 7] 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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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영어는 단어를 암기한다. 아니, 단어’만’ 암기한다. 실제 필요할 때 어떻게 사용하는 지는 관심 밖이다. 그 단어의 한국어 대응어가 무엇인지 하나만 ‘알고’ 있으면 된다. ‘good=좋은’ 식으로 ‘하나’면 충분하다. 그렇게 알고 있는 단어 개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지식영어의 세계에서는 영어 잘 하는 사람이 된다. 그래서 속성 암기법이 인기가 높다.

‘속성 단기간’ – 조급함이 잘 드러난다.

지식영어의 단어 학습에는 조급함 말고 한 가지 모습이 더 있다. 바로 ‘허세’이다. 이른바 ‘고급 단어’를 알아야 영어 잘 하는 거라는 허세. 그래서 ambiguity, ubiquitous, carcinogen, deterioration, deforestation – 이런 단어들을 좋아한다. 초등학생이 토플 단어를 암기한다.

온통 허세다.

지식영어에서는 영어 못하면 머리 나쁜 사람이 된다. 그래서 모르는 게 나오면 창피하다. ‘기적의 암기법’을 동원할 수 밖에 없다. 창피하지 않으려면 모든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남들이 모르는 것을 알고 있으면 우쭐해지며 희열을 느낀다. 그래서 지식영어는 잘 나오지 않는 희귀 단어나 예외적인 문법 사항을 좋아한다. 그리곤 이런 질문을 잘 던진다 – “너 이거 알아?”

영어 못하면 창피하다. 자신감이 하락한다. 주눅든다. ‘영어 열등감’이다. 반대로 영어 좀 하는 사람은 자신감이 하늘을 찌른다. 토익 점수 좀 높고, 어학 연수 좀 다녀오고, 어렸을 때 외국 생활 좀 하면 콧대 높아진다. ‘영어 자만심’이다. 자만심은 열등감이 있기에 가능하다.

영어 한 마디 못해도 아무 지장 없는 한국 땅에서 외국어 하나 때문에 누구는 자만심을 갖고 누구는 열등감을 느끼는 것이 현실이다.

지식영어의 단어 학습은 겉모습이 참 번드르르하다. 남들이 모르는 단어만 외우고 있으니 그렇게 보일 수 있다. 문제는 그 번드르르한 허세 가면을 벗으면 드러나는 민낯이다. 참 볼품 없다.

자신도 볼품 없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그 허세 가면을 못 벗고 그 가면 위에 화장을 한다. ‘XX 암기법’이라는 이름의 화장, ‘X개월 영어 완성’이라는 이름의 화장이다. 의미 없다. 화장하고 있는 얼굴이 우리 자신의 얼굴이 아니기 때문이다.

“암기 & 허세” 단어학습, 의미 없다. 그 영어는 우리 자신의 영어로 남지 않기 때문. 평생 지식영어를 주입 받은 우리는 이런 사실을 모른다. 오히려 자신의 노력 부족 때문에 영어가 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는 암기를 더 열심히 하자고 다짐한다. 암기하고 까먹고, 암기하고 까먹고, 또 암기하고 까먹고. 또 다시 반복이다.

자청해서 암기의 노예가 된다. 영어의 노예이기에 자신을 부리는 주인인 영어를 좋아할 수 없다. 짜증날 수 밖에 없는 안타까운 모습이다.

영어 수업의 여러 기억들.

다른 건 몰라도 단어시험은 잊을 수 없다. 영어 시간 마다 빠지지 않았던 단어시험. 틀린 개수만큼 회초리를 맞아야 했던 그 시험. 이 단어시험은 우리 머릿속에 ‘영어는 암기’라는 착각을 심어버렸다. 단어 잘 외우면 영어 잘 하는 거라는 착각이다.

단어시험이나 중간고사 같은 시험 점수가 우리에겐 영어 실력이었다. 벼락치기 암기로 점수를 올리고 영어 실력이 늘었다고 착각한다. 영어 시험 점수는 올려봤지만 진짜 실력은 올려보지 못했다. 그래서 ‘점수’가 아닌 ‘진짜 영어 실력’이 는다는 것 자체가 무엇인지 모른다. 암기와 허세 식으로 공부 해봐야 영어 실력 느는 게 아니라고 알려줘도 공감할 수가 없다.

영어 실력은 일단 ‘단어’에서 시작된다고 단정하기 때문이다. 영어를 못하면 아는 단어의 개수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속단한다. 자신의 암기 노력이 충분하지 않아서 영어가 늘지 않는다고 반성한다. 그리곤 마음을 다시 잡고 단어를 빨리 늘리겠다고 다짐한다.

이런 우리들을 돌팔이들 약 광고가 툭툭 건드린다. 한 번 해보라고. 실력 늘리는 거 별 거 아니라고. 몇 달 안 걸린다는 식의 뿌리치기 힘든 작업 멘트를 날린다. 요즘 광고는 과학적 근거까지 들이댄다. 무슨 대학 출신에 무슨 실험과 연구를 거쳤다는 식의 광고. 우리는 이런 광고 속 숫자에 혹하고, 근거도 불분명한 과학적 데이터에 솔깃한다.

마지막으로 속는 셈 친다고 생각하며 지갑을 연다. 정말 마지막일까?

댓글 문답

독자: 이렇게 문제점을 제시하고 나서 나름 해결책도 주시나요?

오성호: 해결책이라.. 그 해결책 전부를 책으로 쓰기엔 넘 벅찹니다 제가 수업을 하는 이유에요. 아실 줄 알았는데.. ^—^


독자: 이렇게 문제점을 제시하고 나서 나름 해결책도 주시나요?

오성호: 아~ 저는 단어책 새로 쓰는 걸 물어보시는 줄 알았어요. 그럼요. 이 책에 단어 얘기 그래도 꽤 들어갑니다 ^^


독자: 눈팅족입니다^^; 잘 읽고있어요 만고 어려운 단어 암기해 셤 치고 딱 까먹고마는.. 저도 여러번 해봐서 쓸데 없는 짓이라는 것도 너무 잘 아는데요ㅠㅠ 근데 신문기사 논픽션 책 등 읽으려니 어쩔 수 없이 저런 어려운 단어 알아야할 수 밖에 없더라구요 결국 단어던데 잘못 돼었을까요? 1대1단어암기. 암기법 이런게 잘못된거다라는건 정말 동의하는데 어려운 단어외는게 왜 허세인지 잘 이해가…

오성호: 네 안녕하세요. 결국 ’단어’라는 건 맞는 말씀이에요 그런데 어려운 단어가 아니라 우리가 쉽다고 생각하는 단어가 우리 발목을 잡을 겁니다. ‘허세’ 얘기는 다음에 올리는 글 읽어주시고 의견 또 주세요. 감사합니다.


오성호: 주변에 친구들, 선생님들에게 배우고 저 혼자 노력하면서 생각해보고.. 그랬습니다. 영어 하는 사람 중에 이런 생각 갖고 있는 사람 많아요. 단지 그냥 혼자 생각만 할 뿐입니다. 다른 사람을 설득시키는 건 넘 힘들어요. ㅜㅜ


독자: 오성호 선생님의 영어에 대한 지론에 큰 공감을 하는 학습자입니다. 영어 = 암기는 결코 아니겠지만, ‘암기’ 역시 중요한 부분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비단 영어뿐 아니라 성인이 외국어를 배우는 데 있어서 ’암기’는 크게 중요하다고 생각을 해요. 사실 그 경로와 방식이 다를 뿐 아이들이 모국어를 익히는 데도 ’암기’되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영어=암기’라는 잘못된 인식 못지않게 ‘암기’ 자체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크게 비뚤어져 있는 것도 문제라는 생각입니다. 시험 칠 때까지만 내 머릿속에 남아있는 단기기억에 의존한 ‘암기’ 말이죠. 선생님 강조하시는 대로, 양질의 문장을 접하는 것. 그것을 눈으로 보는 것은 물론 소리 내 읽어도 보고 그리고 효율적이고 자신에게 맞는 학습법으로 공부[암기를 포함]하는 것. [국내에서 사기 광고하는 것 말고,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라는 외서처럼 최근 현대과학이 제시하고 있는 학습, 암기법 등을 참조하는 것] 결론인즉슨, ’암기’는 외국어를 배우는 데 중요한 요소인데 그 ’암기’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고치고, 올바른 방향으로 정립해야 한다는 것이 저의 짧은 생각입니다.

오성호: “암기”라는 단어에 대해 서로 정의가 다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실 저도 책에서 암기의 정의를 어떻게 해야할 지 고민 중이에요. 실례가 안 된다면 Modesto 님이 생각하는 암기가 어떤 건지 궁금합니다. ^^


독자: 오성호 선생님의 영어에 대한 지론에 큰 공감을 하는 학습자입니다. 영어 = 암기는 결코 아니겠지만, ‘암기’ 역시 중요한 부분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비단 영어뿐 아니라 성인이 외국어를 배우는 데 있어서 ’암기’는 크게 중요하다고 생각을 해요. 사실 그 경로와 방식이 다를 뿐 아이들이 모국어를 익히는 데도 ’암기’되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영어=암기’라는 잘못된 인식 못지않게 ‘암기’ 자체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크게 비뚤어져 있는 것도 문제라는 생각입니다. 시험 칠 때까지만 내 머릿속에 남아있는 단기기억에 의존한 ‘암기’ 말이죠. 선생님 강조하시는 대로, 양질의 문장을 접하는 것. 그것을 눈으로 보는 것은 물론 소리 내 읽어도 보고 그리고 효율적이고 자신에게 맞는 학습법으로 공부[암기를 포함]하는 것. [국내에서 사기 광고하는 것 말고,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라는 외서처럼 최근 현대과학이 제시하고 있는 학습, 암기법 등을 참조하는 것] 결론인즉슨, ’암기’는 외국어를 배우는 데 중요한 요소인데 그 ’암기’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고치고, 올바른 방향으로 정립해야 한다는 것이 저의 짧은 생각입니다.

오성호: 글 감사합니다. 하지만 생각하시는 의미가 분명하게 와닿지는 않네요 ㅜㅜ 저는 ’암기’는 그냥 시험용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조만간 제가 글 하나 써서 더 많은 분들의 의견을 들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글은 2017.05.07 네이버 카페 「오성호 영어채널」의 ‘영어, 이제는 잘할 때도 됐다’ 게시판에 처음 올라온 글입니다. 카페 원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