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 5] 생존
생 존
우리는 흔히 미국영어, 영국영어 식으로 영어를 나눈다. 물론 여러 다른 방식으로 나눌 수도 있지만, 실전용 언어영어가 아닌 시험용 지식영어가 판치는 우리나라에서는 흥미롭게도 시험 이름으로 나누기도 한다. 수능영어, 편입영어, 임용영어, 토플영어, 공무원영어 식으로 말이다. 출제 방식에 따라 구분했을 뿐, 물론 다 같은 영어이다.
이런 구분 말고 실용적인 차원에서 영어를 나누면 어떻게 될까? 영어를 하는 구체적인 목적이나 현재 영어 실력에 의해서 말이다. 통번역사가 되기 위한 영어 학습과 해외여행 중 쇼핑에 필요한 영어 학습이 같을 수는 없으니.
‘실전용 언어영어 vs. 시험용 지식영어’와는 다른 기준으로 나눠서 아래와 같이 세 가지로 구분해보자.
생존영어 vs. 소통영어 vs. 전문영어
생존영어. 이름이 좀 그렇지만, 말 그대로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영어 실력이다. 문장을 제대로 만들지는 못하고 자신이 아는 단어만 나열해서 의사 표현을 하는 정도. 짧은 문장 이해는 가능하지만, 문장이 조금 길어지면 자신이 아는 단어로 의미를 짐작하는 정도이다.
소통영어 단어만 뱉는 단계는 벗어나 문장을 만들어 가는 영어. 흔히 말하는 관광쇼핑영어, 해외에서 관광하고 쇼핑하는데 무리 없는 실력.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표현은 가능하다. 회사에서는 외국 손님 오면 식사 접대 가능한 말 실력. 영어로 이메일 주고 받을 수 있을 정도의 글 실력이다.
전문영어 일상 영어에서 벗어나 전문 분야의 의사소통이 가능한 영어. 회사에서는 영어로 보고서 작성하고 PT 진행할 수 있는 실력. 해외 출장 가서 상대를 설득시키고 올 수 있는 능력. 외국 유학 생활에 큰 어려움 없는 실력. 영어로 된 영화나 드라마, 뉴스를 (완벽하지는 않아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실력.
영어가 아닌 다른 외국어는 ‘생존’ 단계만 되어도 괜찮은 실력이다. 그러나 영어에는 엄청난 시간, 노력, 돈을 쏟아 부었다. 그런데 ‘생존’ 단계 정도 밖에 안 된다면? 억울해야 한다.
생존영어는 해외 쇼핑 가면 Price? How much? Expensive / Discount 식으로 주로 단어 나열식 영어를 한다.
반면 소통영어는 How much is it? / Price is too high. / Can you give me discount? / I want to confirm reservation. 식으로 (100퍼센트 자연스러운 문장은 아니지만) 문장을 만들어 본다. 영어에 더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I got ripped off. / This is such a bargain. 회화책에서 자주 나오는 이런 문장에도 익숙하다.
전문영어는 책에 나오는 문장 외우는 단계에서 벗어난 영어. 하고 싶은 말을 매끈한 문장으로 스스로 만들어서 할 수 있는 영어. 예를 들어 “대출은 제대로 알아본 후에 결정해야해” 라는 표현을 하고 싶다면 이렇게 여러 가지로 표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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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모든 문장이나 표현을 가르쳐주는 책은 없다. 자신이 꾸준히 영어를 접하면서 하나씩 쌓아가는 거다. 전문영어 단계 정도 되면 영어와 우리말을 1대1 대응식으로 기계적으로 옮기는 단계는 벗어난다. 영어 몇 년 안 한다고 영어 다 까먹는 일은 없다. (위 세 문장은 뒤에 더 자세히 나온다)
여러분 가족을 떠올려보자. 아빠, 엄마, 삼촌, 이모, 숙모, 고모, 형, 누나, 오빠, 언니, 동생, 조카, 사촌 등등. 모두 (초)중고등학교 때 영어 배운 사람들이다. 위 세 가지 영어 중 어디에 속하는 사람이 가장 많을까?
대부분 ‘생존영어’ 수준 아닐까? 그렇다. 제대로 된 영어 문장 하나 만드는 게 힘겨운 생존영어 수준에 불과하다.
요즘 뜨는 ‘기본영어’ 강좌들은 일상 표현 공부와 기본적인 문장 만들기 수업이다. 생존영어에서 소통영어로 올라가려는 사람들을 위한 수업이다. 이제라도 겉멋과 허세에서 벗어나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은 반길 일이지만, 한편으론 몇 십 년을 영어 붙잡고 난 후 다시 ‘기본’을 해야한다는 게 너무 안타깝다.
생존영어와 소통영어의 실력 차이보다는 소통영어와 전문영어의 차이가 훨씬 더 크다. 아주 훨씬 더 크다. 전문영어 수준이 되는 것은 정말 어렵다. 전문영어 실력은 ‘암기’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소통영어 단계에서는 암기 학습이 어느 정도 효과를 본다. 누구나 쓰는 보편적인 문장이나 표현을 학습하는 단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어를 더 하다 보면 암기 만으로 안 되는 때가 분명히 온다. 기계적인 1대1 대응으로는 감당이 안 되는 거다.
그렇게 암기가 아닌 이해가 필요한 순간이 오지만, 우리는 암기 습관을 못 버린다. 언어 능력이 늘어나면서 단순 암기로는 불가능할 정도로 알아야 할 것이 많아지는데 말이다. 잘 하다가 포기하는 순간이 대부분 이 시기이다.
영어 학습에 대해 우리가 흔히 하는 말이 아래에 있다.
단어 학습은 암기로 가능하다 문장을 통으로 외우면 영어 실력이 는다 문법 필요 없고 회화가 중요하다 발음 때문에 혹은 말이 빨라서 영어가 안 들린다 어떤 문장을 단번에 이해 못하고 몇 번씩 읽으며 이해해도 그 문장을 이해한 거다 이해 안 되는 문장이라도 몇 번이고 계속 들으면 이해가 된다 전화 영어 서비스나 회화 수업으로 말하기 실력이 는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소통영어의 초기 단계까지 적용된다. 딱 그 정도이다. 원하는 영어 실력이 그냥 의사소통 조금 하는 정도면 위 방식대로 가볍게 영어를 접하면 된다.
그러나 다른 외국어와는 달리 영어에서는 대개는 의사 소통 이상의 것을 원한다. 영어로 멋지게 발표도 하고 수업도 듣고, 보고 싶은 드라마나 영화도 자막 없이 보고 싶어한다. 그 정도(전문영어 단계)를 원한다면 영어 학습에 대한 생각을 싹 바꿔야 한다. 완전히 싹.
읽기, 듣기, 말하기, 쓰기 모두 실시간 개념이다 글을 읽거나 말을 듣고 바로 이해해야 이해력이 있는 사람이다 필요할 때 바로 입으로 말할 수 있고 글로 적을 수 있어야 표현력이 있는 사람이다. 이해나 표현을 하느냐 못 하느냐가 관건이 아니다. 이해나 표현을 “단번에” 하느냐 못 하느냐가 관건이다.
그렇다. 읽기, 듣기, 말하기, 쓰기 모두 ‘단번에’ 돼야 한다. 전문영어의 세계에서는 ‘단번에’가 아니면 별 의미 없다.
시험 지식영어 차원에서는 단순히 ‘알다’ 만으로 족하다. 그러나 실전 언어영어로 올라오면 ‘알다’가 아닌 ‘하다’의 차원이 된다. 그러나 실전에서도 전문영어 차원에서는 단순히 ‘하다’ 개념도 부족하다. ‘필요할 때 바로 할 수 있다’로 더 엄격해진다. 그 순간 이해하고 그 순간 표현할 수 있어야 그게 진정한 언어 능력이다.
“대출은 제대로 알아본 후에 결정해야해” 이 말을 하고 싶은 순간에 아래 문장 중 하나 정도는 바로 할 수 있는 실력이 진정한 언어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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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를 공통과목으로 지정해 전국민이 강제로 하게 만들었으면 이 정도 실력은 만들어줘야 한다. 그러나 우리 영어 교육이 지향하는 시험을 위한 지식영어 교육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어떤 글을 단번에 이해 못하고 몇 번씩 왔다 갔다 하면서 읽어도 보기에서 답만 골라내면 실력을 인정해주는 시험 지식영어에서는 불가능하다. 시험과 실전의 차이는 오락실 자동차 운전과 실제 도로 운전의 차이라고 보면 된다.
우리가 영어를 해온 모습은, 도로로 나가서 실제 운전할 생각은 안하고 오락실 운전 게임에서 고득점을 올리려고 그 게임 코스를 외우는 거였다.
학생을 탓할 수도, 선생을 탓할 수도 없다. 그렇게 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학교교육제도가 그 원인이다.
댓글 문답
독자: 시험영어의 굴레에 갇혀 있는 상황에서 한국인들의 전문영어로 도달하고 싶은 강박증은 거의 울분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영어 사교육에 수조 원의 돈을 쏟아붓는데, 그 쏟아부은 돈이 너무나도 아깝게 느껴져서인지, 10년 넘게 공부한 시간이 아깝게 느껴져서인지 영어의 한이 참 많이 서려 있습니다. 그런데 그 수조 원의 돈을 쏟아부은 데는 영어 유치원이나 조기유학을 제외하고는 전부 시험영어입니다. 투자한 데가 시험영어인데도, 어쨌든 ’영어’에 막대한 돈과 시간을 투자한 거니깐, 생존영어도 안되는 판국에 당장 소통영어를 뛰어넘어 전문영어로 단번에 도달하고 싶은 헛된 야망이 한국 사람들 마음 속 깊이 내재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시험영어에 투자한 것이 전문영어의 성과로 나오기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됩니다. 또 모국어에 대해서는 지극히 관대하고 영어는 조금만 틀려도 위축되고 자신감 없어 하면서도, 타인의 영어실력에 대해서는 칼 같이 엄합니다. 즉, 본인이 못 하는 것에도 지나치게 엄하고 타인의 영어실력은 ‘도대체 얼마나 잘하는지 보자’ 식입니다. 유튜브같은 사이트에서 한국인이 영어를 하는 동영상이 올라오는 날에는 댓글에 “발음만 요란하다”, “문법이 엉망이다”, “어휘가 초딩 수준이다”, “그러는 너는 영어로 저 정도로 말 할수 있냐”, “괜히 영어도 못 하는 것들이 부러워서 그러는 거다” 라며 늘 소모전에 불과한 언쟁이 오고갑니다. 이러한 현상도 전문영어 강박증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의 영어교육 제도를 송두리째 뒤집어엎어 버리고 그때부터 차근차근 ‘진짜 영어’ 실력을 쌓아 나갈 생각은 하지 않고 애초에 생존영어 조차도 안 되는 상황에서, 전문영어라는 오아시스가 어디선가 갑자기 빵! 하고 봇물 터지듯 철철 흘러나오길 희망하며, 오늘도 수 많은 한국 사람들이 영어공부에 도전했다 포기하고, 재도전했다 또 포기하고를 무한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고질적인 전문영어 집단 조급증에서 빨리 벗어나야 될 것 같습니다.
오성호: 올려주시는 댓글 잘 읽고 있습니다. 제 생각과 여러 면에서 비슷해서 깜짝깜짝 놀라곤 합니다. 제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도 짚어주시고.. 감사합니다!! 의견 계속 올려주세요~~ ^^
이 글은 2017.04.17 네이버 카페 「오성호 영어채널」의 ‘영어, 이제는 잘할 때도 됐다’ 게시판에 처음 올라온 글입니다. 카페 원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