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 4] 집착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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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착 2

영어로 자기 소개도 못하는 영문과 학생, 셰익스피어 수업을 듣고 있다.

나 역시 영어영문학 전공자였다. 입학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든 생각은 - “나는 누구? 여기는 어디? 여기가 내가 있을 곳인가?”

입학 당시 내 영어 실력은 과연 어느 정도였을까? 미국 초등학생 수준 (그것도 저학년) 정도 아니었을까? 그 능력으로 영문학과 영어학을 공부한다고 들어간 거다. 우리 열 살 아이가 국문학과에 들어가는 것과 하나 다를 것 없었다. 영어로 자기 소개 하나 제대로 못하는 학생이 셰익스피어 수업을 들어야 했던 거다. 너무 너무 힘들었다.

자신의 나이가 스물이면 영어 능력도 스무 살일 수 있다고 착각한다. 아니, 스무 살에 맞는 영어를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우리 나라의 스무 살 영문과 전공자에게 적합한 교재는 셰익스피어가 아니라 동화책이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우리 학생들의 영어 나이를 생각하자. 솔직히 열 살도 많이 봐준 게 아닐까?

서로 영어가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인 교수와 학생들이 영어로 대학 수업을 한다. 이른바 ‘영어몰입강의’

대학 수업을 해외 여행 쇼핑 정도로 착각한다. 대충 해보고 못 알아들으면 손짓 발짓으로 할 정도 실력이면 영어 강의가 가능하다고 착각한다. 미국 아이들 영어 실력에도 못 미치는 영어 실력으로 대학 강의를 따라갈 수는 없다 (영어 안 되는 교수도 수업하기 어렵기는 마찬가지). 아이들을 앞에 놓고 경제원론을 가르치지는 않는다.

우리말로 해도 어려운 대학 수업을 서로에게 어색한 영어로 수업을 하는 이유는? 영어에 대한 노출이 부족해서 영어를 못하는 것이고 따라서 노출을 늘리면 영어가 늘 거라는 막연한 환상 때문. 생각은 맞지만 방법이 틀렸다. 말도 안 되게 틀린 거다.

그리고 우리는 영어를 배우러 대학을 가는 게 아니다. 대학은 학문을 배우는 곳이다. 영어도 늘지 않고 수업 내용도 이해 못하게 만드는 ‘영어몰입강의’는 없어져야 한다.

별 노력 하지 않아도 쉽게 몇 달 만에 영어 실력 늘게 해준다는 업체나 강사들이 많다.

영어를 꾸준히 열심히 하면 영어 실력이 는다는 광고는 없다. 별 노력 하지 않아도 쉽게 몇 달 만에 실력이 는다는 광고 밖에 없다. 사기 임이 분명하지만 사기를 입증할 수 없는 광고.

이 사회는 각종 시험이라는 수단을 동원해 우리에게 영어를 잘 하라고 강요한다. 한국 사람에게 “아니 영어도 못해?”는 망언까지 해댄다. 그래서인지 영어 잘 하는 사람들은 콧대가 높다. 다른 모든 능력이 더 뛰어나지만 영어가 딸린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고개를 숙여야 하는 게 우리 사회. 그게 싫어서 나름 영어에 돈과 시간을 투자하지만 영어 실력은 늘지 않는다. 상황이 이러니 사기 같은 영어 광고에 지갑을 열 수 밖에 없다.

무능한 학교영어교육에 사회 전반적인 영어 우대 현상에 장사꾼의 머리가 합쳐진 대국민 사기극이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이 땅에서 펼쳐진다.

영어 유치원에서 시작한 헛돈 쓰기는 이렇게 계속 된다.

무능한 교육부는 이런 업체나 강사를 모셔오지 않고 있다.

몇 주 만에 영어 실력 늘게 해준다고 주장하는 업체나 강사들 흔하다. 교육부는 도대체 뭐하고 있나? 이 사람들 모두 영입해서 영어교육의 틀을 다시 짜야 한다. 상식적인 머리로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기적 같은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이 대단한 능력자들을 왜 썩히고 있는지 모르겠다. 내부 머리로 안 되면 외부 인사라도 영입해야 한다.

10년 넘게 학교 영어교육 받아봐야 자기 소개 하나도 제대로 못하는 실력 밖에 안 된다. 그런데 다른 한 편에서는 불과 몇 달이면 입에서 영어 술술 나오고 자막 필요 없이 드라마 볼 수 있게 해준다고 주장한다.

한 쪽이 무능한 건지 아니면 다른 한 쪽이 사기꾼이라는 건지. 헷갈린다.

수능이 끝나면 해마다 변별력 얘기가 나온다. 너무 어려워도 문제, 쉬워도 문제다.

너무 어려우면 사교육 조장의 우려가 있고, 너무 쉬우면 시험의 기능을 제대로 못 한다고 말한다. 근데 과연 이 수능이란 시험이 어떤 기능을 하고 있기에 기능 타령을 하고 있는 지 모르겠다.

아이들의 꾸준한 학습을 유도하는 기능인지, 아니면 아이들 실력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기능인지. 내가 보기엔 둘 다 아니다. 아이들은 수능 때문에 영어를 혐오한다. 싫지만 억지로 해야 할 과목 중 하나로 여긴다. 우리 나라 모든 객관식 영어 시험과 마찬가지로 수능 역시 실력 평가의 기능을 따질 수 없는 시험이다.

때로는 이런 생각이 든다.

출제 위원들이 일 제대로 했는 지 점검하는 시험이 아닌가 하는 생각. 해마다 수능이 끝나면 문제의 ‘변별력’ 얘기만 나오니 말이다. 너무 어려워도 문제, 너무 쉬워도 문제. 시험이 실제 영어 실력에 도움이 되는 지 혹은 도움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지에 관한 얘기는 없다. 자기들이 문제 잘 냈는지 못 냈는지가 가장 큰 관심사이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 객관식 영어 시험 문제를 붙들고 있을 작정인가?

기초영어 열풍이 불며 중학교 영어를 다시 배우고 있다. 각종 기초영어 학습 서비스들이 뜨고 있다. 유명 연예인의 광고 덕도 물론 있다. 하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간단하다.

수요가 있기 때문. 영어 처음 배울 때 했던 그 기초적인 내용도 모르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다는 뜻이다. 몇 십 년을 영어에 매달렸는데, 결국 우리는 다시 중학교 영어로 돌아가고 있다.

Back to basics – 해답은 기본에 있다는 아주 멋있는 문구. 그러나 우리 영어 학습에서는 전혀 멋있게 들리지 않는다. 그동안 바친 시간과 돈이 얼마인데 다시 기초로 가라는 말인가? 다른 일반 상품이었다면 당연히 환불 처리를 해줘야 한다.

전국민이 기초영어로 다시 돌아가는데 지금까지 우리 영어교육을 해온 당사자들은 아무 책임감도 못 느낀다. 나 몰라라 한다. 아마 지금도 내년 수능 영어 시험 난이도 걱정하며 변별력 타령이나 하고 있을 지 모르겠다.

기초 영어를 표방하는 업체들이 많아지면서 이 업체들 간의 광고전도 치열해지고 있다. 광고 카피를 살펴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대부분이 “~하지 않아도” “~가 없어도” 방식을 선호한다. “노력은 우리가 할 테니 여러분은 노력하지 않아도 됩니다. 영어 그렇게 어렵지 않아요. 단어나 문법 실력 없어도 괜찮아요. 영어 쉬워요” 식이다. 영어에 지친 소비자들이 솔깃할 수 있는 문구이다.

평생 수강권을 준다는 제안도 있다. 평생 자기네 수업을 들으라는 말. 아무리 들어도 실력은 안 늘어나니 평생 들어야 한다 – 이런 말인가? 차라리 홈쇼핑 상품처럼 마감 임박을 내세우며 지금 당장 구입하라고 재촉하는 쪽이 더 괜찮아 보인다.

평생 들을 수업이 있으니 든든할 지 모르겠다. 하지만 착각하지 말자. 오늘 거금을 주고 일괄 구매한 강의는 앞으로 ‘들어야 할’ 수업이지 ‘이미 들은’ 수업이 아니다. 집에 책을 쌓아 놓고 있다고 교양이 느는 것은 아니다. 세계 각 지역 요리의 레시피 파일을 갖고 있다고 쉐프가 되는 건 아니다.

평생수강권? 대표적인 영어 호구의 모습이다.

우리들 모두 참 죽어라 영어 했는데 영어 무지 못한다. 투입한 시간과 돈을 감안하면 결과물은 끔찍할 정도이다. 그런데 각 개인의 능력 부족이나 노력 부족을 그 이유로 드는 사람도 있다. 그건 아니다. 우리는 학교에서 시키는 대로 그리고 기업과 사회에서 원하는 대로 개처럼 따라했을 뿐이다. 개인 탓을 하는 건 너무 비겁하다.

개인의 나태함이나 무능력이 그 이유라면 전국민이 뭐가 되나? 우리 부모가 그랬고, 우리가 그랬고, 우리의 아이들이 모두 나태하고 무능하다는 얘기 밖에는 안된다. 외국어 하나가 사람을 바보로 만들고 있다.

국민의 시간과 돈을 써가며 몇 십 년 동안 실시해온 영어교육 효과 실험은 이제 끝내자. 아무 효과 없음이 증명된 영어교육 시스템은 바꿔야 한다.

이제는 학교 영어교육에 대해 진지하게 얘기할 때이다.

영어 좀 하냐는 질문에 주저없이 그렇다고 대답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영어 광고 카피 중에 정말 말도 안 되는 게 있다. “원어민처럼 할 수 있다” “원어민 수준” “원어민 부럽지않다” 식으로 원어민을 들먹이는 것. 우리는 원어민처럼 못 한다. 원어민 수준, 평생 안 된다.

이런 광고를 하도 많이 접하다 보니 ‘원어민’이 우리 영어 학습의 목표가 된다. 원어민처럼 못하면 영어를 제대로 하는 게 아니고 아직 더 해야 할 실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오는 현상이 몇 개 있다.

우리말 전화 통화는 중간에 못 알아들어도 얼마든지 다시 말해 달라고 한다. 영어 통화 중에 그런 말을 하면 그 사람은 ‘LC 안 되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외국인과 대화할 때 주저주저하며 곧바로 말이 안 나오면 ‘회화 안 되는 사람’으로 간주한다.

남의 나라 언어인 영어에 대해 우리는 너무 엄격한 기준을 내세운다. 완전함을 요구한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모르는 게 있으면 우리 자신은 영어를 못 한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영어가 아닌 다른 외국어라면 어떨까? 지금 영어 실력 정도의 다른 외국어 실력이면 아마 자랑하고 다닐 지 모른다. 일본어 꽤 한다고, 프랑스어 꽤 한다고 말이다.

영어는 언어가 아닌 공부의 개념이었기에 우리는 “영어 잘 한다”는 말을 쉽사리 못한다. “특기가 영어예요” 말할 정도의 실력을 가진 사람들 조차도.

아이가 있는 집 냉장고에는 어김없이 영어 단어 그림이 붙어있다. 아이가 영어 유치원에서 배운 영어 단어 하나를 발음하면 온 가족이 “와~~”하고 탄성을 지른다. 아이의 영어 실력을 위해 가족과 생이별하고 혼자 사는 아빠들이 있다. 우리가 우리 땅에서 영어 못하는 게 흠이 된다. 영어 못하면 놀림거리가 되고, 해외 경험 있는 연예인이 영어 몇 마디 하면 “와~~”하는 장면이 아직도 방송에 나온다. 영어 하나 배우기 위해 대학생들이 그 많은 돈을 들여 어학연수를 떠난다. 영어 시험 점수가 대학생 스펙의 필수가 된 건 한참 됐다. 공무원이 되는데 영어 시험이 필수이다. 대통령이 해외에 나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영어로 연설하고 그게 멋있다고 착각한다. 전국적으로 앞다퉈 진행했던 영어마을사업도 생각난다. 심지어 영어를 공용어로 하자는 주장도 나왔었다.

살아보지는 않았지만 일제시대 당시 일본어 위상이 이 정도 였을까? 그런 일본어의 위상이 해방 후 영어로 이어졌던 걸까?

영어 못하면 큰일날 것처럼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아니, 영어 어디 쓸 데가 있다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맞다. 우리 대부분에게 영어는 어쩌다 가는 해외 여행에서 잠시 필요한 도구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사람마다 잘 하는 게 다 있고 필요한 게 모두 다르다. 영어는 영어가 필요한 사람이 제대로 하면 되는 거다. 전국민이 이렇게 평생 광적으로 달려들 필요는 없다.

영어,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지나치게 중요하게 생각한다.

댓글 문답

독자: 잘 읽었습니다. 전 딸 키우면서 요즘 이런 생각이 많이 들던데요. 왜 수학시험 볼 때 계산기를 못쓰게 하는 것인지, 왜 영어 시험 볼 때 스마트폰으로 사전을 못 찾게 하는것인지. ㅋㅋㅋ. 전 둘 다 쓰게 하려고요… 학교에선 못 쓰게 하겠지만, 최소한 교문 밖에 나오면 무조건 쓰라고요. 특히, 숙제할때요. ㅋㅋ. 물론, 유치원생이라 아직 나중 얘기이긴 하지만요.. ^^

오성호: 일반 시험이 아닌 번역 시험에서도 사전 못 쓰게 합니다. 저도 이해 불가 ^^


독자: 문법책에선 되게 온화하신 느낌이었는데 요번에 작업하시는 원고의 글투는 완전 전사느낌이네요 ㄷㄷ 글 읽고 생각해보니 우리나라에서는 영어(=영어성적)가 유년기에 생겨나는 어떤 열등감의 원형 중 하나일 수 있겠다 싶어요. 자부심이든, 열등감이든, 위장된 무관심이든 간에 영어 자체에 대해 과잉된 감정을 보이는 사람들을 정말 많이 봤거든요. 그런데 심지어 그렇게 강제된, 그래서 집착했던 서열화의 기준이라는 게 실제 영어 능력과는 동떨어져 있으니, 시험 성적으로 상위권을 랭크했다 해도 실전에서 써먹으려면 거기서 영어는 또 스타트 오버… 쩝. 대체 이 짓을 우리가 왜 하고 있는 걸까. 에휴. 그런 생각이 드네요.

오성호: 옛날 네오퀘스트 느낌이 좀 나네요. 뒤집어본 영문법은 존댓말을 써서 다르게 느끼시는 것 같아요. 맞습니다. 영어는 우리를 이상하게 만들어요. ㅜㅜ


독자: 이 카페회원분들 말고 다른 이들과 공유해보고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은 글이지만 선생님께서 출판하실 원고니까 책나올 때 가지 기다려야겠네요 ㅎㅎㅎ

오성호: 이 게시판으로 출처 밝혀주시고 퍼가셔도 괜찮습니다. 어차피 출간되면 다 공개될 내용이고 책 전체 내용 중의 극히 일부에 해당하기 때문에 아무 상관없습니다 ^^


오성호: 정답. 전문인이 되는 거에요 거기에 영어를 덤으로 잘 하면 됩니다 ^^

이 글은 2017.04.03 네이버 카페 「오성호 영어채널」의 ‘영어, 이제는 잘할 때도 됐다’ 게시판에 처음 올라온 글입니다. 카페 원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