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 3] 집착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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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착

앞에 소개한 스무 개 현상을 보고 “집착은 무슨? 뭐가 문제라는 거야?”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일단 그 생각부터 바꿔보자. 20개 현상에 약간 살을 붙여서 내 생각을 더 적어보겠다.

우리나라에서는 경찰공무원 시험에 영어가 필수 과목이다. 소방공무원 시험에도 영어는 필수 과목이다. 영어 쓰는 미국 범인을 잡는 것도 아니고, 영어 안내가 돼있는 영국 건물의 불을 끄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런데 이 시험 점수가 높다고 실제 영어 능력이 뛰어난 것도 아니다.

명분도 실리도 없는 개떡 같은 시험이다. 직무와 거의 관련 없는 외국어 능력 때문에 경찰관이나 소방관의 꿈을 접어야 하는 사람이 나올 수 있다. 너무 억울하다. 억울한 정도가 아니라 기가 막힐 노릇 아닐까?

왜 모든 국민에게 영어를 강요하는지 모르겠다. 직무에 관련도 없는데 왜 모두 영어 시험을 봐야 하는 건지 도저히 이해 불가이다. 공무원 중에 정작 영어를 잘 해야 할 사람들은 외교부 공무원들 아닌가? (외교부 공무원님들, 영어 잘 하시나?)

경찰관이나 소방관에게 영어 실력보다 더 필요한 것은 봉사심과 사명감 그리고 강인한 체력이다.

한 국제 기구의 책임자로 임기를 마치고 귀국해 대권을 노리던 분이 있었다. 그 분의 말씀.

“솔직히 말씀드리면 다자정상회의 갔을 때 우리나라 대통령 중에 외국정상과 통역없이 (대화) 할 수 있는 사람도 이승만 때부터 몇 분이나 되겠느냐. 그런 것이 상당히 안타깝다”

별 게 다 안타깝다. 자신 영어 실력에 대해 이런 저런 얘기를 들었던 사람의 입에서 나올 말은 절대 아니었다. 아니 영어 실력이 뛰어나다 해도 해서는 안 될 말이었다. 우물 안 개구리도 아니고 평생 외교관 생활을 한 이 사람 조차, 영어 잘하면 그 사람의 위상이 올라간다고 착각한다. 그렇다면 본인부터 영어 실력을 더 쌓았어야 했다.

뉴욕에 가면 거지도 할 수 있는 게 영어이다. 우리나라에서나 떵떵거리지 해외로 나가면 영어는 그냥 하나의 언어일 뿐이다. 대통령이 못 하면 대신 영어 잘 하는 통역사 쓰면 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대통령은 영어 잘 하는 대통령이 아니다.

아이의 영어교육을 위해 가족과 생이별하고 국내에 남아 교육비를 벌고 있는 아빠가 있다. 일명 ‘기러기 아빠’

얼마나 대단한 교육을 시키려고 가족과 헤어지는 것까지 마다하지 않는 걸까? 뒤집어 말하면, 우리의 영어교육은 얼마나 형편 없기에 한 가족을 이렇게 헤어지게 만들고 있는 걸까?

교육이라고 말하지만 실상은 ‘조기 영어 학습’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렇다. 아이들 영어 잘 하게 만들어주려고 우리 부모들은 생이별을 감수하고 있다. ‘기러기 아빠’의 모습은 씁쓸하고 안타깝다. 가족 모두 바라던 결과가 나온 행복한 경우도 있지만, 외국에 보낸 결정을 뼈저리게 후회한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영어를 잘 하니 세상과 소통은 편할 지 모르겠지만, 정작 아빠와는 대화가 잘 안 통하는 아이의 모습. 우리가 원하는 가족은 그런 게 아니다.

영어가 가족을 갈라놓을 정도로 대단한 놈은 결코 아니다.

세계화 시대의 국제 사회에서 ‘영어=경쟁력’이라고 주장한다. 과연 그럴까?

집계에 따라 다르겠지만 전세계에서 영어 할 줄 아는 사람은 10억에서 20억명 정도라고 한다. 이렇게 보편적인 능력을 경쟁력이라고 할 수 있을까?

국내 경쟁력은 있을 지 모르겠다. 입시나 취직에서 영어가 필수이니. 그러나 영어 그 자체가 경쟁력인 직업은 통번역사나 영어 강사 정도 밖에 없다. 영어가 한 사람의 주된 능력이 아닌 ‘플러스 알파의 능력’일 때 그 영어는 경쟁력이 있는 거다.

영어만 잘 하는 사람을 뽑지는 않는다. 기왕이면 ‘영어도’ 잘 하는 사람을 뽑는 거다.

영어는 삶에 도움을 주지만 그 자체로 경쟁력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다. 국내에서 이 정도인데 국제 경쟁력이 있다고?

이민을 생각한 적이 있다. 다른 나라에 가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 지 생각해봤다. 없었다. 평생 영어교육 관련 일만 해온 나. 국내에서는 영어 좀 한다고 으스대면서 나름 경쟁력이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반복되지만) 뉴욕 가면 거지도 할 수 있는 게 영어이다.

국제 사회에서 경쟁력을 키우려면 자신의 핵심 능력을 키워야 한다. 영어는 핵심 능력에 부가적으로 붙는 ‘플러스 알파’ 정도에 불과하다.

‘국영수’ – 중고등학교 부동의 주요 과목이다. 여기에 영어가 왜 포함되는 지 모르겠다. 한낱 외국어에 불과한 영어는 우리 교육의 참 귀한 손님이다.

혼자 상상해본다. 학교 교육에서 영어가 빠지면 어떻게 될까? 완전히 빼는 건 황제 대접을 받던 영어에게 너무 가혹할 수도 있다. 그럼 그 비중을 좀 줄여보면 어떨까? 음악, 미술, 체육 과목 정도의 대접을 해주는 쪽으로 말이다.

발칙한 상상이지만 의외로 기발한 아이디어가 될 수도 있다. 이 얘기는 나중에 좀 더 구체적으로 해보자.

영어 시험의 형태가 보기 중에 맞는 답 고르는 객관식이다.

영어를 하나의 언어로 생각한다면 말도 안 되는 짓이다. 언어는 실제 사용하려고 배우는 거지, 지식으로 알고 있으려고 배우는 게 아니기 때문. 따라서 언어 능력을 테스트하려면 실제 시켜봐야 한다. 객관식 필기 시험이 아닌 실기 시험을 봐야 한다.

그러나 우리 영어 시험은 “알아 or 몰라?”만을 물어본다. 어디선가 한 번 들어서 알고 있어도, 어젯밤 벼락치기로 공부해 알고 있어도, 운이 좋아 찍어서 답을 잘 골라도, 우리 영어 시험은 “잘 했어요!” 칭찬 해준다.

우리가 영어를 그렇게 오래 해도 영어 못 하는 근본적인 이유이다. 우리는 영어를 언어로 배우지 않았다. 당연히 언어로서의 영어를 잘 할 수가 없다.

시험 난이도, 변별력 이런 거 바꾼다고 시간 허비하지 마시라. 시험에 관한 근본적인 생각을 바꾸시라.

전국민이 평생 영어 스트레스를 받고 살아간다.

영어 유치원 다녀오면 그 날 배운 것을 부모에게 보여줘야 하는 꼬마들. 옆집 아이보다 왜 못하냐는 비교를 그 때부터 들어야하는 우리 아이들. 옆 반 아이는 토플 단어도 공부한다는 소식에 스트레스 받는 초등학생들. 내신에 각종 모의고사에 궁극적으로는 수능이라는 장애물을 넘어야 하는 중고생들.

시험 점수 없으면 취업이 안 되니 스터디에 학원에 바쁜 대학생들. 회사 눈치 보여서 영어 실력 늘려야 하지만 시간도 돈도 없는 직장인들. 옆집 아이와 비교했던 아까 그 부모. 이제는 아이가 와서 친구 부모들은 영어 잘 하는데 우리 엄마 아빠는 왜 그러냐며 원망한다.

이렇게 영어는 모든 이에게 평생 스트레스를 주고 있다. 그렇다, 평생.

우리말도 서툰 어린 아이들이 영어 유치원에 다니고 초등학생이 토플을 배운다.

영어유치원이 이제는 보편적인 현상이 되어가고 있다. 주변 아이들이 다니고 있으니 친구 사귀기 위해서라도 다니는 경우도 있다. 영어 때문에 고생한 부모가 아이는 그러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보내기도 한다. 영어는 어려서 시작할수록 좋다는 믿음 때문일 거다. 하지만 그 믿음은 착각일 수 있다.

우리는 평생 영어에 헛돈을 쓴다. 그 헛돈의 시작은 영어 유치원이다.

초등학생에게 토플을 가르친다.

나중에 어차피 봐야 할 시험이니 조금이라도 어렸을 때 시작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토플 정도는 해야 내 아이가 앞서간다고 생각한다. 나중에 특목고 가려면 토플은 필수라고 생각한다.

정작 현실은?

이전 세대보다 더 이른 나이에 영어를 싫어하게 된다. 외우고 잊어버리고 외우고 잊어버리는 그 무한 반복의 지긋지긋한 세계에 더 일찍 들어간다. 헛돈을 더 일찍 쓰기 시작한다. 헛돈의 액수도 훨씬 더 커진다.

초중고 내내 영어교육을 받은 대학생이 영어로 자기 소개 하나 제대로 못 한다.

이게 현실이다. 영어가 아니라 운전을 그 정도로 배웠으면 전국민이 카레이서 실력 정도 되지 않았을까?

우리의 학교 영어교육은 별 효과가 없다는 것을 전국민이 돈과 시간을 바쳐 가며 이렇게 직접 증명했다. 우리 아버지가 증명했고 우리가 증명했고 우리의 아이들이 증명하고 있다.

이 정도 됐으면 바꾸는 게 순리이다. 완전 뜯어 고치는 것만이 전국민이 몇 세대에 걸쳐 허비한 돈과 시간을 조금이라도 보상받는 길이다.

이렇게 아무 쓸모 없는 수능 영어 시험을 계속 보고 있다.

우리 영어교육의 개떡 같은 단면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수능 영어 시험이다. 우리들이 영어를 싫어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를 대라면 나는 바로 이 ‘수능’ 시험을 들 것이다.

의도가 불순하고 방법이 잘 못 됐고 효과는 전혀 없는 시험이다. 영어 실력 향상을 유도하기 위한 시험도 아니다. 실력을 정확히 평가할 수 있는 시험은 더더욱 아니다. 나중에 말하겠지만 정말 황당하기 그지 없는 문제 출제로 사람들을 경악하게 만든다. 어차피 아이들 실력으론 제대로 풀 수 없기에 답만 골라낼 목적의 요령이 판친다.

이 말도 안 되는 시험 잘 보려고 우리 아이들은 시간과 돈을 허비하고 있다.

수능 영어는 시험의 기능을 전혀 못하고 있다. 그런 시험은 없애야 한다. 그게 모두를 위한 길이다.

댓글 문답

오성호: “설마” 소리 밖에 안 나옵니다. 사실이 아니길 영어 강사 입장에서 기대해봅니다 ㅜㅜ


오성호: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다 이해했습니다. 정말로 너무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상태라 ’한 방’으로 해결될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이상적인 얘기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일단 영어 환상에서 벗어나는 것과 모든 국민에게 대충 영어를 가르치는 건 이제 좀 그만두고 정말 필요한 사람들에게 확실하게 가르치는 쪽으로 바꾸는 게 아닐까 해요. 물론 구체적 방안으로 들어가면 여러 이견이 있겠지만요.. ㅜㅜ


독자: 5.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어요. 굳이 영어를 가르칠 거면 음미체 시간에 활용하면 좋을 거 같다고 음미체 과목의 특성상 바로 바로 피드백이 이루어지고 타과목에 비해 영어 수준도 크게 높지 않아서 학생들이 즐기면서 할 수 있을 거 같아서요. 예를 들면 체육 시간에 만약 농구를 배운다했을 때 이론은 한국어로 설명하고 “Go for it”, “Pass me the ball” 마찬가지로 미술 시간에 그림을 그릴 떄 이론은 한국어로 설명하고 “Draw a circle and divide it into 4 parts” 교사가 칠판에 시범을 보이면서 영어로 말하는 거에요 이렇게 되면, 따로 영어교사가 필요하다기보다는 타교과목 교사들이 영어를 할 줄 알아야하는데 조금 버겁겠죠? 다시 말씀 드리지만 영어교육을 이런 식으로 하자는 게 아니라 굳으 할 꺼면 지금과 같은 방식말고 이런 방식이 더 재밌을 거 같아서요!

오성호: 그렇죠. 어떤 식이 됐든 지금의 수업 형태와 시험 방식은 바꿔야 합니다. ^^


독자: 저는 구구절절 다 공감하는 선생님의 말씀이십니다. 특히, 공교육에서 영어가 너무 큰 비중을 차지하는게 문제죠. 영어 가르칠 필요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선생님께서 지적하신 대로 수학과 함께 대부분의 학생들 진로, 입시에서 너무 영향력이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러한 평가시험의 타당도도 매우 낮고요. 저는 영어교사가 되고 싶어 시험을 준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오성호 선생님께서 안내해주신 방향대로 영어공부를 하고 있지만 영어교육이 “모든 학생들”에게 예체능 과목보다 중요하게 여겨질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성호: 제 생각에는 학교나 선생이 엄청난 수업과 시험으로 너무 지나치게 관여를 하는 것 같아요. 자신들이 영어를 전부 가르쳐줘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겠죠. 한 발 뒤로 물러나 아이들을 지켜보는 쪽으로 가는 게 더 효과적일 것 같아요.


독자: 영어가 글로벌 의사소통을 위한 것이 아니라 기득권 유지와 출세를 위한 수단이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예전 jtbc 드라마 아내의 자격에서 김희애가 극중 남편에게 초등학생이 ibt 100점? 미친거지 그건 미국 상위권 대학에서나 요구하는 점수야 라고 말한 대사가 떠오르네요

오성호: 주변에 더 물어봐야겠지만 초등학교 토플은 정말 “왜?” 질문을 던질 수 밖에 없습니다.


독자: 선생님 말씀 동의합니다 한국에서는 영어가 권력이 되어버린것같아요. 한국 영어 교육 목표가 의사소통을 목적으로 한다고 교육과정에 나와있는데 우리는 이제것 교육과정을 무시한채로 교육받아 왔죵 이제서야 조금씩 그런부분을 살짝 인지하고 학교에서 시험으로서의 영어의 중요성이 점차 줄어들고있는 것같아요 영어교사 인원과 수업시수도 줄고있고 국영수가 중심이되었던 교육에서 영어는 조금씩 중심에서 빠져나오고 있는것같습니다 올해부터 수능이 절대평가방식으로 바뀐다고 하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근데 현행 시험유형과 난이도를 그대로 유지한채로 평가방식만 바꾸는게 큰 의미가 있을지 의문입니다 그래도 그전 보다는 학생들 부담이 조금 줄어들것같아서 다행스럽긴합니다만 선생님 생각이 궁금해요 평가체재의 변화가 영어시험폐지로 흘러갈수있는 시발점이 될것인지..

오성호: 일선 현장에서는 이렇군요. 내신이든 수능이든 대학 입시에 영어가 끼어드는 게 별로인 거 같아요. 설명 감사~ ^^


독자: 선생님 말씀 동의합니다 한국에서는 영어가 권력이 되어버린것같아요. 한국 영어 교육 목표가 의사소통을 목적으로 한다고 교육과정에 나와있는데 우리는 이제것 교육과정을 무시한채로 교육받아 왔죵 이제서야 조금씩 그런부분을 살짝 인지하고 학교에서 시험으로서의 영어의 중요성이 점차 줄어들고있는 것같아요 영어교사 인원과 수업시수도 줄고있고 국영수가 중심이되었던 교육에서 영어는 조금씩 중심에서 빠져나오고 있는것같습니다 올해부터 수능이 절대평가방식으로 바뀐다고 하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근데 현행 시험유형과 난이도를 그대로 유지한채로 평가방식만 바꾸는게 큰 의미가 있을지 의문입니다 그래도 그전 보다는 학생들 부담이 조금 줄어들것같아서 다행스럽긴합니다만 선생님 생각이 궁금해요 평가체재의 변화가 영어시험폐지로 흘러갈수있는 시발점이 될것인지..

오성호: 평가 방식 바뀐다고 크게 달라질 것 같지 않아요. 점수가 너무 잘 나와도 문제, 안 나와도 문제 문제가 어려워도 문제, 쉬워도 문제인 게 수능이니. 궁극적인 해결책은 없애는 게 아닐까 합니다


오성호: 정글아마존님이 달아주신 댓글의 원글이 삭제됐네요. 내용이 좋아서 책 쓰면서 참고하려고 했는데 왜 지우셨나요? ㅜ

이 글은 2017.03.28 네이버 카페 「오성호 영어채널」의 ‘영어, 이제는 잘할 때도 됐다’ 게시판에 처음 올라온 글입니다. 카페 원문